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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둘기같이 임하시는 성령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 1장과 2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을 말합니다. 그 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중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시작된 내용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통해 3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마지막에 보면, 그렇게 모인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을 배웠고,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걷지 못하는 자

     

    그런데 누가가 그런 이야기 바로 다음 3장에서 오늘 본문의 사건을 언급합니다. 누가가 초대교회가 이렇게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는 말씀 다음에 사도행전 3장에서 이 걷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사건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안 계신 초대교회에도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일까요? 아마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와 모인 교회가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매일같이 성전 미문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성전에 예배나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할 수 있게 하게 위해서입니다.

     

    그는 그곳에 앉아서 돈을 기대하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 자기 삶을 비관했겠죠?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고통의 세월을 살아가는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평생 자신의 힘으로는 걸어서 다닐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세월이 지난 들 이 사람의 삶이 변하겠습니까?

     

    우리 모습의 발견

    감사와 기쁨의 에배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그 걷지 못하는 자의 삶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첫째, 그 사람이 날 때부터 못 걸었고, 앞으로 평생 자신의 힘으로는 걸어 다닐 수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 또한 날 때부터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복하는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 자신을 회복시킬 수 없고,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 자신의 힘으로는 걸을 수가 없는 그 사람처럼 우리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것을 얼마나 많이 거절했는지 모릅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말씀도 얼마나 외면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죄 가운데 있는 인생이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성전에 달려올 수 없는 인생인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인생도 걷지 못하는 자의 인생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둘째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없는 이 사람에게 세상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에게 돈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에게 근본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에게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성전 앞에 앉게 해 주고, 그저 동전 몇 개를 던져주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 삶에 일시적인 도움이나 위안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 즉 우리를 걷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럼에도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려 할 때, 그는 그들에게 적선을 바랐습니다. 그의 잘못된 기대가 바로 이 부분이고,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교회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혹시 세상의 은과 금 아닌가요?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줄 수 없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오늘 이 못 걷는 사람처럼 교회에서 은과 금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람들은 교회가 도덕적 영향력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자선을 베풀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정치적인 어떤 개혁을 이루어 낼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가 사회의 모든 분야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경은 그것을 행하는 주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그 일을 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교회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기쁨의 기준을 하나님께

    감사를 하나님께

     

    그러면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니 교회가 꼭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베드로가 그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해 주는 말입니다. 6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만이 가진 것을 주라는 겁니다.

    걷지 못하는 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성전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인생이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성전에 달려올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이며, 세상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도움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고 우리만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우리 삶의 기준이 세상적인 관점이 아니고, 나의 관점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준을 나의 관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바꿈으로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자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삶의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의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기준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감사한 일이 있으십니까? 어떤 일로 감사하셨습니까?

    아니면 누구에게도 말기 어려운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병원에 가면 대부분의 의사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반드시 운동을 해야 되고, 과로를 피하고, 스트레스 받지말고, 특히 음식을 조절해서 먹어야 한다. 기름진 것, 튀긴 것을 피하고, 커피도 마시지 말고, 맵고 짜고 단 것을 피하라고 합니다. 그 말은 먹는데 대한 즐거움은 포기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기쁨으로 진료실을 나섭니까? 아마도 기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내 몸을 진단하고 처방해서 감사는 하지만, 하지 말라는 것 먹지 말라는 게 많으니까 기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서라면 의사의 권면에 따라 음식을 먹는 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맛있는가? 맛없는가?”에서 내 몸에 유익한가? 해로운가?”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얘기한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내 기준에 좋은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진정하고 원천적인 기쁨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맺는말

    교회에서의 감사와 기쁨

     

    교회는 은과 금을 가져다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통해 인간의 영혼의 근본을 회복시키고, 그들의 삶을 마비시키는 원인을 찾아내 치료하는 곳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그런 기쁨만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라고 합니다.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기쁨은 결국 우리에게 실망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는지? 우리 삶의 기준이 아직 안 바뀌었으면 진정한 감사와 기쁨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 것으로 기뻐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주신 기쁨으로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세상의 은과 금이 없어도, 오직 나를 구원하시고, 나에게 생명주시고, 나를 일어나 걷게 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니,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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